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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계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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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 고지의 장기 침체 === '''직접 피해''' 남부 고지는 전쟁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전장이었다. 1883년 3월 왕당파의 결집지였고, 그해 겨울 봉쇄로 기근을 겪었으며, 1884년 여름 의회군의 진격로였고, 1885년 2월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인구 감소는 약 9%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사망만을 계산한 것이며, 전후 이주까지 포함하면 실제 인구 손실은 훨씬 컸다. 1885년 이후 10년간 남부 고지에서 내해 연안 공업 도시로 이주한 인구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이주자 다수가 청년층이었다. '''구조적 침체''' 침체가 길어진 것은 전쟁 피해 자체보다 '''그 피해가 회복될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 토지 자본이 몰수·분할되면서 대규모 투자의 주체가 사라졌다 * 청년층 이주로 노동력이 빠져나갔다 * 공화국 정부의 재건 투자는 내해 연안 산업 지대에 집중되었다 * 이 지역이 국민투표에서 반대 우세를 보인 정치적 배경도 투자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있다 그 결과 남부 고지는 20세기 내내 루이나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았다. 오늘날 벨포르와 남부 항만 도시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자주 지적되는데, 그 격차의 기원 가운데 하나가 1883년의 겨울이다. '''기억과 정체성''' 경제적 침체보다 오래 남은 것은 정서적 거리였다. 남부 고지에서 이 전쟁은 헌정 투쟁이 아니라 '''벨포르가 이 땅을 굶겨 죽인 일'''로 기억되었고, "굶주린 겨울"이라는 표현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공화국의 공식 서사와 이 지역의 기억 사이의 간극은 20세기 중반까지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1709년 [[합병법]]으로 왕국에 병합된 이래 남부 고지는 언제나 반쯤 바깥에 있는 지역이었고, 계승전쟁은 그 거리를 좁히기는커녕 결정적으로 벌려 놓았다. 이 지역이 공화국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두 세대 이상이 걸렸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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